사건 개요
오늘날 노동자는 늘어나는 업무량과 경쟁·실적에 대한 중압감 속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러한 부담은 고객응대를 주로 하는 감정노동자나 영업직 노동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일반 사무직 노동자 역시 복잡한 대인관계 속에서 서로 감정적으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이와 같은 노동 조건과 환경 탓에 노동자의 우울증과 정신질환도 늘어나는 추세다.
대법원은 업무상 과오로 징계·승진누락·구상권 청구 등의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자살한 노동자에 대해, ‘망인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대법원 2019.5.10. 선고, 2016두59010).
사실관계
망인 A는 서울시 산하 교통공기업 B사에서 20년간 근무했으며, 사망 당시에는 재정팀장으로 자금업무를 맡고 있었다. A는 2011년 11월 회사에 대한 감사원 감사에서 문책사항이 드러나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감사원은 2010년 2월 16일부터 2011년 2월 18일까지 B사를 감사한 결과, B사가 스크린도어 설치공사 시공업체로부터 부가가치세(17억2400만원)를 돌려받지 못한 과오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망인 A를 포함한 담당직원 4명에게 정직처분 등 징계를 내리라는 취지의 문책요구서를 B사에 보냈다.
A는 감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서울시장과 B사 사장으로부터 모두 6회에 걸쳐 표창을 받았고, 재직기간 동안 징계를 받은 적이 없었으며, 평소 밝고 유쾌한 성격으로 동료들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그러나 감사 과정에서 조사와 문책을 받자 A는 징계 가능성을 걱정했고, 승진에서 누락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가족과 동료의 진술에 따르면, A는 감사 결과를 알게 된 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고, 사망 2주 전부터는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남들이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 것 같다”는 말을 거듭 되풀이했다. 또 회사가 손실에 대해 자신에게 구상권을 청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했다.
결국 A는 2011년 11월 27일 등산로에서 목을 매 숨졌다. 유족은 A의 자살이 업무상 재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를 신청했으나, 공단은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을 내렸다. 유족은 공단을 거쳐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에 재심사를 청구했지만 이 역시 기각됐다.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부지급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은 ‘감사원의 문책요구 대상자 중 망인을 제외한 다른 징계대상자들에 비해 망인에게만 극심한 우울증을 초래할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A의 업무와 자살 사이의 업무관련성을 부정했다(서울행법 2016.6.16. 선고, 2015구합 80994). 항소심도 같은 이유로 유족의 청구를 기각했다(서울고법 2016.10.20. 선고, 2016누53564). 하지만 대법원은 A의 업무와 자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했다.
대법원의 판단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제1호에서 정한 ‘업무상 재해’란 근로자가 업무수행 중 그 업무에 기인해 발생한 부상·질병·신체장해 또는 사망을 뜻하며, 업무와 재해 발생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인과관계, 의학적·자연과학적 증명까지는 요구하지 않아
재판부는 근로자가 업무상 스트레스로 우울증세가 악화돼 자살한 경우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기존 대법원 판례를 제시했다.
“인과관계는 이를 주장하는 측에서 증명하여야 하지만,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증명이 있다고 보아야한다. 따라서 근로자가 자살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경우에, 업무로 인하여 질병이 발생하거나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그 질병의 주된 발생원인에 겹쳐서 질병이 유발 또는 악화되고, 그러한 질병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 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결여되거나 현저히 저하되어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서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추단할 수 있는 때에는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살자의 질병 내지 후유증상의 정도, 그 질병의 일반적 증상, 요양기간, 회복가능성 유무, 연령, 신체적·심리적 상황, 자살자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상황,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한다(대법원 2014.10.30. 선고 2011두14692판결 등 참조).”
여기에 더해 재판부는 “망인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될 수 있고, 비록 그 과정에서 망인의 내성적인 성격 등 개인적인 취약성이 자살을 결의하게 된 데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자살 직전에 환각, 망상, 와해된 언행 등의 정신병적 증상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여 달리 볼 것은 아니다(대법원 2014.10.30. 선고, 2011두14692 판결, 대법원 2015.1.15. 선고, 2013두23461 판결 등 참조).”라는 법리도 함께 제시했다.
재판부는 A가 감사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로 인한 극도의 불안감과 우울감을 지속적으로 느꼈으며, 자살 직전에는 이상행동에 이르는 등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우울증 증세가 악화된 것으로 인정했다.
또 재판부는 A가 “동료들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했고, 감사원 감사 이전에는 신경정신병적 증상으로 치료전력이 없었던 점”을 들어, A의 자살이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적 장애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A가 평소 업무 외의 다른 요인으로 자살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적 장애 상태에서의 우발적 자살
실제로 A는 자살 전 가족이나 지인에게 유서를 남기지 않았고,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 설치된 로프를 나무에 걸어 목을 맸다. 재판부는 이러한 사실 등에 비춰 A의 자살을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적 장애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기존 대법원의 판례 법리와 사실관계에 기초해 “망인이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으로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정신장애 상태에 빠져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A의 업무와 사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
판결의 의의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는지는 ‘보통 평균인’이 아니라 당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이다(대법원 2008.1.31. 선고, 2006두8204, 대법원 2007.4.12. 선고, 2006두4912 등 참조).
‘보통 평균인’ 기준으로 판단해 온 하급심에 대한 경종
그럼에도 정신질환이나 자살 사건에서 업무상 재해 인정 여부가 다투어질 때, 근로복지공단이나 하급심은 ‘당사자의 특별한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보통 평균인’을 기준으로 재해와 업무의 관련성을 판단해 온 경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사건에서도 대법원 판결에 앞서 내려진 근로복지공단의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유족의 재심사 청구 기각, 1·2심 행정소송 판결은 모두 망인 A의 스트레스 원인과 정도, 자살 무렵의 정신적 상태를 판단하면서 함께 징계요구를 받았던 다른 근로자와 비교했다. 그 결과 나머지 3명의 근로자는 별다른 일이 없는데 유독 A만 자살한 이유를 개인의 정신적 취약성에서 찾았고, 그에 따라 A의 업무와 자살 사이의 업무연관성을 부인했다.
산재보험제도의 취지와 목적은 재해노동자와 그 유족의 생활을 보장하는 데 있다. 정신장해나 자살로 인한 사망에서 ‘평균적 노동자’나 ‘사회적 평균인’을 기준으로 산재 인정 여부를 판단한다면, 정신적으로 취약한 노동자는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기 어려워진다. 이는 정신적으로 취약한 노동자에게 재해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노동자 개인의 과실을 따지지 않고 재해노동자의 생활을 보장한다는 산재보험의 기본정신에 어긋나는 논리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법원 판결은 산재보험제도의 취지에 충실한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
자주 묻는 질문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될 수 있나요?
대법원은 업무상 과오로 징계·승진누락·구상권 청구 등의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자살한 노동자에 대해, 업무와 사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대법원 2019.5.10. 선고, 2016두59010). 업무상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악화돼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에서 자살에 이르렀다고 추단할 수 있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될 수 있다.
업무와 자살 사이의 인과관계는 의학적으로 증명해야 하나요?
인과관계는 이를 주장하는 측이 증명해야 하지만,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증명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때 질병의 정도와 일반적 증상, 연령, 신체적·심리적 상황,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상당인과관계는 ‘보통 평균인’을 기준으로 판단하나요?
아니다. 대법원은 상당인과관계의 존부를 ‘보통 평균인’이 아니라 당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보여 왔다(대법원 2008.1.31. 선고, 2006두8204 등 참조). 이번 판결은 ‘보통 평균인’을 기준으로 삼아온 하급심 경향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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